지속되는 전후(戰後)
관부재판의 의의가 사법적 판결로만 평가될 수는 없지만, 한평생 가난과 통증에 시달려온 피해자로선 어떠한 실질적인 배상도 받을 수 없는 재판 결과 앞에서 낙담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순덕은 누구보다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한 환경에 있었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에 대한 요구 또한 굽히지 않았다. 익히 알려져 있듯, 19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고, 1993년 고노담화에 대한 향후 실행 과제가 제기되자, 일본 정부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으로 약칭)을 발족했다(1995.7.19.). ‘국민기금’ 사업의 골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이 담긴 국민 성금과 정부의 출연을 모아 기금을 마련하고, 이 기금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에게 의료·복지 사업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하나후사 에미코는 민간 기금 구상이 나왔을 때,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활동가들과 원고들이 고민했던 일화를 전한다. 아파도 병원에 갈 돈이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피해자들에게 국민기금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민간 기금을 내세우는 일본 정부의 태도는 전쟁범죄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나후사의 회고에 따르면, 이순덕은 이와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거지가 아니다! 여기저기서 모금한 돈을 내가 왜 받아!’라며 크게 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분노와 동시에 ‘살아 있을 때 돈이 필요하지, 죽고 나선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라며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한다.³ 이순덕에겐 피해자의 존엄만큼이나 생활비 및 의료비가 긴급하고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어쩌면 일본 시민들은 선의로서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모금을 했을 것이나, 그 의도가 어떻든 이와 같은 보상 방식은 피해자로 하여금 피해자의 존엄과 현실적인 도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들고 말았다.
“나는 당신들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도 없습니다. 제 목숨은 길지 않습니다. 주신다면, 서둘러 주셨으면 합니다.
왜 이런 곤궁한 생활을 해야 했는지, 만약 당신들이 인간이라면 당신의 아이가 나처럼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그 마음을 모른다면 인간이 아니라 동물 이하입니다.
저는 제 처녀성을 빼앗겼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저기서 모은 거지같은 돈은 필요 없습니다.”
“私は、あなた方の為に子どもを産むこともできないのです。 私の命は長くありません。くれるというなら、 急いで欲しいのです。
なぜ、このような困窮生活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か、もし、あなた方が 人間なら、あなたの子どもが私のようにされたらどう思うか、その気持ちが分からないなら人間ではなく、動物以下です。
私は私の処女を奪われました。それに対して、あちらこちらで集めた乞食のようなお金はいりません。”
- 「最終意見陳述」, 『關釜裁判ニュース』 第 22号, 1997.11.16., p. 5.
이순덕은 살아있을 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를,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가끔은 좋은 옷도 사고, 약도 사고, 상처도 치료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지원모임의 공동대표였던 마쓰오카 스미코(松岡澄子)는 이순덕의 구두변론을 방청한 뒤 작성한 기고문에서 “보상금이 나오지 않는 한 나의 전후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이순덕의 말을 전한다.⁴ 그 말처럼 실제로 이순덕은 관부재판이 최종 패소로 끝난 뒤에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운동에 건강이 허락하는 한 참여하고자 했다. 남편과 사별한 뒤 광주에서 혼자 살던 이순덕은 2005년 정대협이 마련한 쉼터 ‘우리집’으로 옮겨와 중요한 순간마다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수요 시위에 참여하였다. 최고령 ‘위안부’ 피해생존자로서 수요시위를 지키고 있던 이순덕의 모습은 동료 피해자, 활동가뿐 아니라 연대하는 시민들에게도 희망과 의지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러나 이순덕은 끝내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받지 못하고 2017년 4월 4일 영면에 들었다.
4) 松岡澄子, 「李順德さんつらい過去を語る 初の本人尋問 弟六回口頭弁論」, 關釜裁判ニュース 第 7号, 1994.10.1., p.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