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빠질 것이 없었던 유년
최갑순은 1918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났다.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 어머니, 아버지, 성과 동생들... 식구는 많았고, 집은 가난했다. 그 와중에 아들이 아닌 딸이라서 ‘섭섭이’라는 아명을 얻었고, 어머니가 젖도 안주고 내버려 두어서 할머니가 거둬서 키웠다. 서숙(조)를 한 주먹 넣고 물을 많이 넣고 끓여서 건더기 하나 없는 국물 반 그릇을 먹는 것이 다였기에 항상 배가 고팠다. 어린 마음에 친구 집에서 밥을 훔쳐 먹다가 들켜서, 어머니에게 두들겨 맞고 아궁이에 처넣어져 불에 꼬슬려 죽을 뻔하기도 했다. 5~6세 어린 나이부터 동생을 돌보며 밥하고 집안일을 도왔으나, 어머니는 치사(致謝) 한번 없이 그녀를 미워했고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다. 최갑순의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는 모나락을 숨기거나 남의 나무를 베어다 팔다가 걸려서 도망가고 없다. 그리고 어머니는 먹을 것 하나 없는 집에서 임신하거나 막 아기를 낳은 몸으로 어린 자식들을 건사하고 사느라 항상 지쳐있고 “독살스러웠다”. 어머니가 최갑순에게 퍼부은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어머니의 모진 삶 속에서의 분노가 가장 약한 자신의 어린 딸에게로 향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최갑순이 집을 떠나게 된 것도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었다. 문제가 생겨서 몸을 피한 아버지를 잡으러 온 순사에게 어머니는 열네 살 된 최갑순을 데려가라고 했다. 남편을 잡아가면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일곱 식구가 굶어 죽을 판이니, 차라리 쟈를 잡아가라고. 마당에서 놀고 있던 최갑순은 “고무신도 사주고 허연 쌀밥도 끼니끼니 너 배부를 때까지”² 먹여준다는 말에 순사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나선 길이 일본군‘위안부’가 되는 것으로 이어질지 몰랐지만, 당장은 그것이 오히려 최갑순에게는 나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만주로 가지 않고 그냥 집에서 살았으면 어땠을 것 같냐는 질문에 최갑순은 “죽었지, 못 살았어”라고 답한다. 다시 팔아먹기 위해서였을지라도, 최갑순을 데러간 순사는 밥도 주고 때리지도 않고 일도 안 시키고 머리의 이도 없애줬다.
“친정에서 그렇고 설움을 받고 그렇게 죽을라 해도 안죽고.
죽어나 버렸으면 얼마나 좋겄어.
그렇고 살더니 일본 사람 따라가니까 그렇고 좋아요.
날 때리지도 않고 야단도 안 치고 일하란 말도 안 하고.”
- (T13-5 03:47-04:03)
2) <증언영상 T13-4>, 39:05 ~ 3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