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피해자 증언 영상 해제 및 콘텐츠화 연구



  온몸으로 관통한 한국 현대사


  최갑순의 귀향은 만주, 두만강, 청진, 개성, 산수갑산, 서울을 거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길은 단선적인 이동이 아니라 역사의 격랑 속에서 분투하는 과정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일본사람들이 사라진 만주에서 여기저기 버려진 옷을 잔뜩 껴입고 떠나, 두만강가에 이르러 그 옷을 팔아 서숙쌀을 사고 강을 건너 이북땅에 가서 팔고, 그 돈으로 고기를 사서 다시 만주로 와서 팔아서 돈을 벌었다. 그러다 “쓰리를 당하고” 같이 장사하던 여자와 손을 잡고 강을 건나가다 넘어져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당시 강을 지키던 유엔군(한국사람과 중국사람)이 머리 끄댕이를 잡고 건져내 줘서 겨우 살았다.

 

“우리 머리끄댕이를 요렇고 둘이 흰 비장을 잡고 건지냈어요. 거그를 뱅뱅뱅뱅 도는 데를 못 들어가게. 

그래갖고 살아나왔어요. 아휴. 긍께 참 그 사람만 아니믄 그 속으로 들어가부렀으면 둘 다 죽었을 것인디. 

그런 고비를 닝기고 인자 다시는 걍 갖다 강천에다 눕혀놓응게 

걍 물이 코에로 꼴꼴꼴, 입으로 꼴꼴꼴꼴, 밑에서도 꼴꼴꼴 물이 쫄졸쫄쫄 막 배가 툭 끄집어갖고 나와 살아났어요.” 

(Tape13-6 19:12-19:48)

 

  그렇게 이북땅으로 건너와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공판장에서 팔고 남은 생선을 가져다가 끓이고 콩깻묵 사서 쪄서 먹고, 나눠 주고, 팔며 살았다. 그러다 청진으로 가서 비지를 얻어먹으러 두부집에 갔다가 두부를 대신 팔아주는 장사를 해서 차비를 벌었다. 그 돈을 가지고 걸어서 개성으로 가서, 개성에서 다시 서울 쪽으로 걸어가다가 한 번 다녀오면 일 년 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산수갑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길에서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사과밖에 팔지 않아서 사과만 먹다 그마저도 떨어져서 내내 굶으면서 가야했는데, 가는 길에 발견한 야생 열매를 따먹으며 가다가 속이 다 뒤집어져서 “똥물까지 다 넘어”오게 우웩질을 했다. 그러다 겨우 겨우 목적지인 산수갑산에 도착했는데, 아편만 키우느라 곡식은 없는 곳이어서 감자를 먹었는데 역시나 속탈이 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금싸래기 만키로” 가지고 있던 쌀을 끓여줘서 “그놈을 먹으니까 눈도 떠지고 사람도 뵈이고 정신이 돌아와”서 살았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난 이후에는 진을 다 뺀 아편씨를 볶아서 콩고물에 묻혀서 먹으며 회복했다. 그리고 여기서 아편을 받아서 감자 속에 감춰서 가져가 팔았다. 당시 돈으로 오천 원, 지금으로 치면 오천만 원이나 될 큰돈을 벌어서 고향에 돌아왔다.


  하지만 어렵게 돌아온 고향에서의 삶 역시 녹록하지는 않았다. 6.25 전쟁이 터지고, 한쪽에서는 곡식 안 준다고 죽이고 또 다른 편에서는 줬다고 죽이고, 총알이 왔다갔다 하는 통에 동생은 ‘산사람’이어서 죽고 최갑순도 만주에서 왔다는 것 때문에 스파이로 몰려서 죽을 뻔했다. 그래도 아편 장사에서 번 돈으로 논 닷 마지기 사서, 몰살당한 동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머슴애를 양아들 삼아서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그러다 나를 성가시게 안 할 “자지 없는” 고자 영감을 얻어서 남의 집 일하고, 공장에서 식모살이 하면서 30여 년을 먹여 살렸다.


  최갑순의 이야기 속에서 짚어보게 되는 것은 그녀가 겪은, 그리고 목격한 폭력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로부터 당한 심리적, 신체적 학대와 할아버지가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한 것은 평생의 한으로 남아 있고, 다섯 살 무렵 옆집 장을 몰래 많이 가져왔다가 아버지가 멍석말이를 당했던 것은 지금도 울먹이며 회상하는 기억이다. 또한 ‘위안소’에 있을 때 ‘손님’을 받는 것도 너무 아팠고, 많이 맞았다. 이때 많이 맞아서 붓고 아팠던 이는 나중에 다 빠져서, 서른 살 무렵에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고름이 심하게 생길 정도로 다쳤던 엉덩이 상처는 큰 흉터로 남아 엉덩이 뒤쪽을 잘 쓰지 못한다. 그리고 거리에서 팔려 왔거나 남편이 외상술 먹고 부인을 넘겨줬다는 사연을 가진 여성들과 함께 만주로 향했고, ‘위안소’에서 아편 중독이 되거나 아기를 가진 채 또는 낳다가 죽은 사람들과 죽으면 그냥 버려지는 “그 사람들의 별꼴을 내가 다 지키구 살았”고, 해방 이후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 맡은 피비린내를 기억한다. 산수갑산에 같이 갔던 여자는 같이 살던 남자가 군대에서 많이 맞아서 정신이 돌아버려서 밤에 자던 아이들을 “쥐새끼”라고 착각하여 때려 죽이는 바람에 도망나왔다는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에 와보니 6.25사변에 가족들이 많이 죽었고, 막내 여동생은 ‘산사람’인 오빠가 어디 있냐고 고문을 당해서 죽었다. 양아들이 살았던 옆 동네에서는 ‘산사람’들 오면 빠져 죽으라고 구덩이를 파고 대창을 꽂아놓았고, 기름을 붓고 불을 내서 사람들이 나오면 찔러 죽이고 태워 죽이는 일이 있었다. 함께 살았던 영감은 어릴적 가난한 살림에 남의 집 일하다 추운 동지에 바닷속에 미역따러 들어갔는데 “붕알이 얼어서 까버렸고” 또 그 상처가 덧나 “똥구녘까지 다 빠져서 병신이” 된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가 내포한 비극적인 장면들이, 가부장제, 식민주의, 군사주의, 계급, 젠더, 이데올로기로 인한 폭력들이 그녀의 삶과 경험 속에 켜켜이 쌓여있다. 이런 기억들을 껴안고 있으니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그래도 최갑순은 “그런 시상을 살고 지내가서, 넘 배고픈 사람을 보면, 내가 고파서 산 일 생각하면, 밥때기 이만한 것도 안 내버”리며 살아왔고, “그런갑다” 생각하며 지나왔다. 최갑순의 웃음이 천진했던 것은 아마도 이런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 한 번을 마음좋게 살던 못한 세상이라서, 넘이 좋아도 묻기만 묻제 꺼들거리기도 싫고,

 나빠도 악착스럽게 달려들어서 막 그냥 기를 피우고 이기를 비우고 하기도 싫고. 그러면 그런갑다. 

그저 귀때기에서 똥 싸면 떨어버리고. 하도 험한 세상을 살아가지고, 뭐 큰 소리가 할 것이 없어요. 

내가 험한 세상을 살아가지고. 시방까지도.” 

(T13-7 21:10-21:45)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위원회 증언팀, 풀빛, 2011 개정판)를 영어로 번역한 Voices of the Korean Comfort Women (Choi, Chungmoo & Yang, Hyunah, Routledge, 2023)의 표지에 실린 최갑순의 모습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한국위원회 증언팀, 풀빛, 2011 개정판)를 영어로 번역한 Voices of the Korean Comfort Women (Choi, Chungmoo & Yang, Hyunah, Routledge, 2023)의 표지에 실린 최갑순의 모습

4) <증언영상 T13-7>, 04:50 ~ 05:30

5) 안해룡 촬영 별도 면접조사(19990619:19990630) 녹취록-2차 면접 앞부분 p.6

6) <증언영상 T13-8>, 05:55 ~ 08:00

7) <증언영상 T13-5>, 10:07 ~ 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