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피해자 증언 영상 해제 및 콘텐츠화 연구



  황금주의 삶과 역사


  황금주는 1922년 부여에서 3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식민지 시기 일본 유학까지 간 지식인이었으나, 공부가 끝날 즈음 병을 앓기 시작하여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황금주는 여러 자리에서 아버지의 약값을 마련하고자 부잣집 수양딸로 나서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황금주에게 아버지는 원망의 대상이라기보다 동경의 대상이자 자부심의 근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열세 살 황금주는 수양아버지 둘째 부인의 호적에 올라 새어머니와 살게 되었지만, 구박이 너무 심해 일 년 남짓 지내다 본부인이 있는 함흥으로 옮겼다고 한다. 다행히 함흥 어머니는 황금주를 친자식과 똑같이 키웠고, 학교도 보내주었다. 그런데 사립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둔 무렵 ‘처녀 공출’이라는 것이 가구마다 배당된다. 한 집에 딸 하나씩은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양부모에게는 황금주 외에 친딸이 셋 있었는데, 황금주보다 한 살 위인 언니는 마침 일본의 대학에 합격하여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고, 황금주보다 세 살, 여섯 살 아래인 동생들은 멀리 보내기엔 아직 너무 어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밤마다 우는 수양부모에게 황금주는 자신이 공출에 나갈 테니 언니를 대학에 보내라고 말했다. 미안했던 수양어머니는 좋은 옷감으로 새 옷을 지어주고, 오빠는 일제 손목시계를 사다주었다. 그렇게 황금주는 세상 어느 부잣집 딸 못지않은 모습으로 처녀 공출에 나서게 된다. 유년 시절 가장 멋지게 차려 입은 순간이 수양부모의 친딸 대신 처녀 공출에 나선 그 때였다는 모순은 어쩌면 남의집살이로 내몰린 가난한 집 딸들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지 모른다.

해방 후 어렵게 찾았다는 아버지(좌) 사진 관련 증언 영상: Tape6-1 13:00~14:55 (IMAGE1331_황금주_5922)
해방 후 어렵게 찾았다는 아버지(좌) 사진 관련 증언 영상: Tape6-1 13:00~14:55 (IMAGE1331_황금주_5922)

  비록 수양딸 처지라 처녀공출에 자진하게 되었으나, 가족이 마련해준 옷과 신발, 수양부모 덕에 배울 수 있었던 일본어는 황금주에게 다른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근거가 되어 준다. 황금주는 함흥역에서 사흘 걸려 도착한 낯선 곳이 ‘길림(吉林)’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기찌림. 길림역이야. …… 나는 일본글을 배웠으니까 읽을 수가 있어. 다른 애들은 못 읽어. 거 배이지[배우지] 않은 사람은.” 길림역에서 또다시 트럭에 실려 도착한 어느 군대에서 같이 온 여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송될 때에도 황금주는 글을 알고 말을 알았던 까닭에 그곳에 계속 남겨진다. 황금주의 육성 증언은 일본어와 숫자를 알았던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으며, 일본어를 잘 모르는 조선 병사를 통역해 주면서 그의 편을 들었다가 두들겨 맞았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한다.


  그곳에서 황금주는 낮에는 온갖 일을 하며 통역을 하고, 밤에는 장교에게 불려가 ‘위안’을 강요당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처음 군인에게 불려갔을 때, 군인은 새어머니가 마련해준 옷을 찢어 버렸고, 황금주는 그 순간 자신이 “죽어 자빠졌다”라고 표현한다. 다치진 않았느냐는 조사자의 질문에 다치진 않고 죽어 버렸다고 하는 황금주의 증언은 위안소에서 겪은 피해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단어 외에 다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구체적인 묘사를 대신하여 발화된 ‘죽어 자빠졌다’라는 말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함축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황금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기지를 발휘했다. ‘위안부’ 여자들은 늘 성병에 시달렸고, 그러면 군대는 여자들에게 606주사를 처방해 주었다. 보통 두 달에 한 번씩 606주사를 맞는데, 약품 정리를 도왔던 황금주는 주사를 도둑질해 놨다가 한 달에 한 번씩 맞았다고 한다. 또, 자신이 상대하는 장교가 매일 알약을 먹는 것을 보고, 그 약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장교 몰래 훔쳐 먹었다고 한다. 극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던 황금주의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황금주 증언자 영상 Tape6-1~3
황금주 증언자 영상 Tape6-1~3


  군수공장에 간다고 속여서 데려왔다고는 하나, 황금주는 ‘2년’이라는 약속은 믿었던 듯하다. 그러나 ‘위안부’ 생활은 사 년이 지나도록 지속되었고, 결국 황금주는 길림에서 해방을 맞는다. 어느 날 군인들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더니, 어느 나이 많은 병사 하나가 조선이 해방되었다고 알려주었다. 황금주는 그 길로 군인들이 버린 옷을 주어 입고 귀향행렬에 섞여 한국으로 돌아온다.


  해방 후 황금주는 그녀를 살린 두 번의 호의를 만난다. 길림에서 출발하여 석 달이 걸려 청량리에 도착한 황금주는 거지꼴이 다 되어 극도로 굶주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 황금주를 국밥집 주인 여자가 안타깝게 보았는지 밥도 주고 목욕도 시켜주고는 원한다면 국밥집에서 머무르며 일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황금주는 해방 이후 청량리에서 생활하게 되고, 그곳에서 6·25 전쟁을 맞게 된다.


“아이구 아주머니 나 같은 거지도 써요? 

그러니까 그 아줌마가 왜 거지는 목간하고 옷 갈아 입고 머리만 저거만 하면 되는데 거지 종자가 따로 있느녜 

그래 난 아주머니 난 못 쓰는 줄 알았다고 이렇게 죽는 줄 알았더니 나 그저 밥만 먹여주세요 그래. 

그래서 그러래.” -(Tape6-2 23:10~32:35)


  두 번째 호의 또한 청량리에서 만난다. 전쟁이 끝난 후 청량리에 돌아온 황금주는 내내 앓아오던 자궁병 때문에 위생병원을 찾아갔다. 거기서 “이런 얘기를 하니까 병원 아줌마들이 그게 자궁병이 아니라 나쁜 병이라”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의사들, 병원 아저씨들, 교회 아줌마들, 동네 이웃의 도움으로 황금주는 수술을 받고 석 달 동안 누워 있을 수 있었다. 석 달 후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전쟁 통에 만나 데려다 기른 아이들은 이웃들이 돌봐주고 있었다고 한다. 의사들이 합심하여 청량리 경찰서 아래에 문간방을 마련해 주고, 교회 아줌마들이 생필품을, 병원 아저씨들이 일 년치 양식이며, 용돈에, 거기다 수술 후 치료까지 지원해 주었다. 황금주가 병원 아줌마들에게 털어놓은 “이런 얘기”가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의사들과 인연이 닿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황금주는 이 일화를 전하며 “그래서 살았어”를 반복할 뿐이다.


  수술 후 기력을 회복한 황금주는 이웃이 이렇게 도와주는데 가만히 놀고 있을 수만은 없어 청량리 뒷시장에서 밥장사를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황금주는 오랫동안 식당을 운영하여 생계를 마련하게 된다. 황금주는 증언을 청취하러 오는 조사자들에게 곧잘 이 빠진 막걸리 사발을 보여준다. 이 막걸리 사발로 막걸리 두 말, 서 말을 팔려면 몇 백 잔을 팔아야 했다고 한다. 막걸리를 팔고, 밥장사를 하며 황금주는 자신의 삶과 역사를 세상에 드러내기까지 살아왔다. 황금주는 증언의 마지막에 ‘이와 같은 역사를 가진 사람은 나 하나 밖에 없다’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비단 ‘위안부’ 피해뿐 아니라, 해방 후 6·25전쟁을 거쳐 증언하는 당시에 이르기까지 모진 세월을 생에 대한 강한 의지로, 때로 이웃의 호의에 힘입어 살아낸 스스로의 역사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바로 그 삶의 곡절이 응축되어 있는 물건이 막걸리 사발이기에 황금주는 자식들의 성화를 물리쳐 가며 그때까지 사발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막걸리 사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곧 황금주 자신의 삶에 대한 것이라 보아도 틀리지 않을 테다.


“이런 사발 봤나 (-굉장히 무겁네요..) 애들이 이거 버리라 해서 내버리라 해서 귀가 떨어졌다 

옛날에 막걸리 하나에 얼마 받았냐면 오 전 받았어 오 전 받었어 

오 전 받고 하루 내 팔면 두말도 팔고 서 말도 팔고 이거 서 말 팔려면 

이거 몇 백 개가 나가야해 이렇게 해서 팔고 내가 이 사발을 없애지 않는 이유가 있어 이거 자손만대 갈 거야

- (녹취록, Tape6-2 3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