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소식[부고] 이옥선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2025-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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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11일 오후 7시 7분 이옥선 할머니께서 별세하셨습니다. 


이옥선 할머니는 1927년 부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6남매 중 둘째였습니다.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공부 욕심이 많았습니다. 일곱 살 때부터 공부시켜 달라고 부모님을 졸랐습니다. 하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할 수 없었고 집안일을 하며 동생들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내내 할머니는 공부시켜 달라고 조르고 울었습니다. 열다섯 살 때 밥도 많이 먹을 수 있고 공부도 시켜 준다고 하여 부산 어느 집으로 양딸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학교를 보내 주기는커녕 온갖 허드렛일을 시켰습니다. 


어느 날 어둑어둑할 때 심부름을 나갔는데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와서 무작정 할머니를 끌고 갔습니다. 어디로 가냐고 물어도 잔말 말고 가자며 끌고 가서는 울산역에 놓고 가버렸습니다. 거기는 다른 여자아이들도 몇 명 와 있었습니다. 열다섯 명이 창문도 없는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끌려갔고 이틀 정도 걸려 중국의 도문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때가 1942년 7월이었습니다. 도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연길에 있는 동비행장에 갔습니다. 거기에는 일본군 비행부대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일본군성노예제 피해를 당하셨습니다. 도망가려고 계획도 해보았지만 사방천지가 군인이고 나다니지 못하니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43년 봄에는 연길 근처 위안소로 옮겨가 성노예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1945년 해방되기 얼마 전 폭격이 심하고 어수선했습니다. 해방된 줄 모르고 거기서 며칠을 있는데 한 조선족 농민이 앞을 지나가다 해방되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연길 시내로 와 먹을 것이 없어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옥선 할머니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서 사시다가 2000년 6월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을 하셨습니다. “내가 1996년에 고향의 가족을 찾아서 잠시 한국에 다니러 왔을 때, 몸 불편한 아바이가, 나 한국에 영영 가버릴까 봐 며칠을 울며 붙잡았더랬어요. 그래서 고향이 그리워도 돌아올 수 없었디요. 그 아바이도 저 세상 갔고 나도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반평생 동안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에 돌아와 살고 싶었습니다.”


할머니는 2001년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되셨습니다. 수요시위, 해외 증언 등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셨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누워 계실 때도 수요시위에 나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시 수요시위에 나오지 못하시고, 1700차 수요시위를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외치셨던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 법적 배상도 받지 못하셨습니다. 


할머니 고통 없는 곳에서 편안하세요.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빈소는 경기 용인시 쉴낙원경기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5월 14일 오전 10시입니다. 

유해는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치될 예정입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2층 추모관에 故 이옥선 할머니를 기리는 작은 추모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추모 공간은 5.25.(토)까지 운영합니다. 

할머니의 명복을 함께 기원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