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기록



<소장기록 콘텐츠>에서는 중요하고 의미있는 기록물을 뽑아 보여주고자 합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피해자와 활동가의 활동 기록, 피해자의 유품, 증언 영상, 사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소장기록 소개 9호> 1998년 4월 시모노세키 판결, 유일한 승소와 부당한 끝맺음

  • 생산일: 2001년 3월 29일
  • 생산장소: 일본 히로시마 고등재판소 앞
  • 생산자: 쓰즈키 스미에(都築寿美枝,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후쿠야마 연락회 전 대표)
  • 규모: 116점 중 1점
  • 유형: 사진류 


이 사진은 히로시마 고등재판소 항소심 기각 판결 직후 열린 집회 장면이다. 참가자들은 한복 차림의 피해자 형상 판넬1)을 들고 항소심 판결의 부당함을 외쳤다. 현수막에는 “관부재판 항소승리 [사죄하라, 그리고 배상하라] 관부재판을 지지하는 후쿠야마 연락회”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부산 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 공식 사죄 등 청구 사건’인 ‘관부(關釜)재판’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하순녀, 박두리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외 6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다.

피해자들과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김문숙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소송을 이어갔고, 한일 시민사회의 연대 속에 진행됐다. 1심은 일본 야마구치현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1993년 9월부터 1998년 4월까지 약 5년간 열렸고, 총 20회의 구두변론과 26차례의 일본 방문이 있었다.

1998년 4월 27일 선고된 1심 판결은 여러 한계를 안고 있었다.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인정되지 않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에 대해서도 당시 불법행위는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국제법이 아닌 일본 국내법에 근거해 “구체적인 국내법이 없으면 국제법 위반을 입증하더라도 승소는 어렵다”2)며, 위안부 피해자 1인당 30만 엔(약 230만 원)의 배상만을 인정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판결은 일부 승소를 이끌어낸 역사적 결정이었다. 재판부는 “20세기 중반 문명 수준에서도 극히 반인도적이고 추악한 행위”라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반인도성을 법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2001년 3월 29일 히로시마 고등재판소는 1심 판결을 뒤집고 항소를 기각했으며, 2003년 3월 25일 일본 최고재판소도 상고를 기각하면서 소송은 최종 패소로 마무리됐다.

1992년에 시작한 관부재판의 1998년 4월 1심 시모노세키 판결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 전후배상 재판 중 현재까지 유일한 승소 판결로 남아있다.


*각주
1: 피해자 형상 판넬은 기증자인 쓰즈키 스미에가 관부재판 원고 피해자들을 보고 직접 원화를 그렸고 '관부재판을 지지하는후쿠야마연락회' 회원들이 판넬을 직접 만들었다.
2: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372쪽
3: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371쪽

*기증정보
- 2022년 3월 4일,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후쿠야마 연락회 전 대표였던 쓰즈키 스미에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DVD, 영상, 사진, 간행물 총 147점을 기증했다.
- 소개글 9호 표지 사진은 기증자의 기증 기록물 중 하나이고 소개 기록물과 같은 날의 사진이다.

*참고자료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년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20년사편찬위원회, 2014
- 발제문 '관부 재판의 의의와 도달점', 국회토론회<일본군'위안부'문제 이렇게 해결하자> 발제자 김창록(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5
- <일본군'위안부' 문제 연구소 웹진, 결>, 논평 '기억의 바다를 넘어서-관부재판이 1990년대 일본 사회에 물었던 것', 마치다 타카시, 2023
- 1992년 관부재판과 할머니들, 하나후사 도시오, 하나후사 에미코, 2023